박명성(공연 프로듀서)

 
 

국내에 초연된 이후 20년을 맞이한 '뮤지컬 <렌트>의 첫 연습'이란 단어는 제게는 무척이나 소중한, 그리움의 한 글자 한 글자입니다. 지금은 돌아오시지 못할 먼 길을 굽이굽이 떠나신 내 어머니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보셨던, 당신들의 첫 뮤지컬이, 바로 '렌트'였기 때문입니다.

뮤지컬 '렌트'의 첫 연습의 설렘에 종일 참아왔던 허기를 달래기 위해 꾸역꾸역 국밥 한 수저를 후후 불어 입에 넣어 봅니다.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 이제 막 양념을 버무린 겉절이를 얹어 우걱우걱 먹는 국밥 한 그릇.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주신 손맛과 참 닮았습니다. "많이 먹고 힘내라, 아들" 국물 한 수저가 위로의 말을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. 그러다 문득, 뜨끈한 무언가가 내 눈에서 흘러내렸습니다.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잊은 지 너무도 오래입니다. 때가 되면 당연히 먹는 밥 한 끼처럼, 한 작품 한 작품 그 소중함을 모른 채로, 때가 되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인 것처럼, 일상적으로 반복하며 '공연 만들기'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는 '지금'입니다.

곡식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삼시 세 끼의 소중함을 갖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느낍니다. 어쩌면 우리의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 또한 그러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. 아무리 눈물로 고개 숙여 사죄드려보아도, 아무리 목청 높여 노래를 흥얼거려 보아도 이제는 어머니를, 아버지를 볼 수가 없습니다. 참 그립습니다. 그리움에 그립습니다. 당신의 옷이 낡고 헤져 찬바람이 살갗을 에어도, 당신의 고무신이 닳고 닳아 빗물에 발이 흠뻑 젖어 와도, 삶에 지쳐 감기는 눈을 새벽 내내 비벼 가며, 한 땀 한 땀 당신께서 손수 새 옷을 지어 주었습니다. 새 옷을 입고 나가 동리 아해(아이)들이 모여 있는 버드나무 아래서, 자랑하듯 넘실넘실 춤을 추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을, 저는 기억합니다.

전 몰랐습니다. 고된 농사일에 힘겨워 밤새 눈물로 얼룩진 어머니의 베갯닢을. 그 땐 정말 몰랐습니다. 어머니의 손가락이 누구 때문에 부르터 갈라져 있는지를. 누구 때문에 깊게 파인 주름골이 어머니의 얼굴에 새겨져 있는지를.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. 하지만….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.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.

저는 20년 전 '렌트' 의 목포공연 때 우리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. 부모님께서는 여기저기 아들 자랑을 하시며 당신의 아들이 만든 굿 보러 가자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셨습니다. 공연이 끝난 후 어머니께서는 "도대체 시끄러워서 뭔 소린지 못 알아 듣것드라" 하시며 시큰둥해하셨습니다. 평생 농사일을 하시는 분들에게 대사가 거의 없이 노래로만 구성된 송스루 뮤지컬이, 게다가 귀청이 터질 정도의 락 음악이라니. 재미있었을 리는 만무했습니다. 그러면서도 저렇게 큰 공연의 대장이 우리 아들이라며 자랑스러워하시고, 주인공이 어땠네, 저땠네 말씀을 주고받고 하셨던 어머니,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.

그 몇 년 후에 다시 한 번 모셨던 뮤지컬 '맘마미아!' 는 그래도 제법 재밌게 보신 듯 했습니다. "다들 신나서 일어서 춤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다들 엄청 좋아하드라" 소풍 전 날 아이처럼 벌겋게 들 뜬 얼굴로 말씀하시던 모습을 떠올리면, 부모님 살아생전에 '나는 왜 더 많은 공연들을 보여드리지 못했을까'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드는 '오늘'입니다.

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인해 지금 우리의 공연시장은 사상 초유의 심각한 피해를 입으며 존폐위기에 몰려있습니다. 공연예술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의 브로드웨이, 런던의 웨스트 앤드 또한 셧다운 되고, 많은 브로드웨이 내부자들은 극장이 9월까지 암흑기를 맞을 것이라고 예측하며, 일러도 7월까지 공연이 언제 재개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.

공연장에 관객들이 가득 차고 성황을 이룰 때는 저 또한 몰랐습니다. 대극장이든 소극장이든 규모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 극장의 무대가 이토록 그리웠던 적이 있었을까요? 연극쟁이에게 설 무대가 없다는 굶주림보다 더 큰 그리움이 있을까요?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? 참 생각이 많아집니다. 지나간 '어제'까지도 우리는, 언제 끝날지 모를 코로나19의 두려움에 무력감마저 느끼며 웅크린 몸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습니다.

하지만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. 더 늦기 전에,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.

저는 연극쟁이입니다. 그렇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시도는 공연을 만드는 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. 여전히 불안한 시작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. 이제 오늘의 뮤지컬 '렌트' 첫 연습에 그치지 않고, 1차 오디션을 통과해 뮤지컬 '빌리 엘리어트'의 주인공을 꿈꾸는, 아역 배우들의 맹훈련 또한 시작하려 합니다. 코로나19로 인해 상반기 계획하였던 큰 공연 4개를 허망하게 취소하고 중단한 이후 찾아온, 긴 기다림 끝에 다다른, 다시 우리 곁에 머물러 준, 참 고마운 '오늘' 우리 모두 더 늦지 않도록, 후회하지 않도록, 함께 시작했으면 합니다.

저작권자 ©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